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김편의 오디오파일] 오디오 색깔론

(서울=뉴스1)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 2018-10-21 07:00 송고
왠 색깔론? 그런 색깔론이 아니다. 그냥 오디오 기기의 색상에 관한 이야기이자, 필자의 멈춰버린 색감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오디오의 색상을 떠올리면 실버나 블랙이 전부다. 실버는 알루미늄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고, 블랙은 그 위에 검은색으로 분체도장을 한 것이다. 그만큼 기기로서 오디오의 색상은 너무나 단조로왔다. 그게 통념이었고, 최소한 필자의 오디오는 그랬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색감은 거의 제로 수준이다. 색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것은 빨주노초파남보에 몇가지 더 추가한 정도에 불과하다. 네이버 검색창과 스타벅스 로고가 정확히 같은 색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오히려 크레파스를 갖고 놀던 어린 시절, 동네 앞산에서 여러 꽃을 보며 꽃말을 외웠던 그 시절에 더 많은 색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살구색, 군청색, 연회색, 갈청색, 연두색, 그리고 닭의장풀의 그 빛나는 청보라며, 사춘기 소년을 달뜨게 했던 참나리의 요염한 주황색 등등.

에고이스타 2A3(오른쪽)과 에고이스타 845(왼쪽)
에고이스타 2A3(오른쪽)과 에고이스타 845(왼쪽)

하지만 일부 메이커를 중심으로 이러한 오디오 기기가 팔색조 변신을 하고 있다. 필자의 수준에서는 도대체 그 색이름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올해 5월 독일 뮌헨오디오쇼에 가서 처음 실물을 본 이탈리아 비바오디오(Viva Audio)의 '에고이스타(Egoista) 2A3'이라는 헤드폰앰프였다. 느낌상 '강렬한 빨간색'이었다. 어떻게 오디오 기기 색깔로 이런 과감한 색을 집어넣었는지 신기했다. 노란색 섀시를 단 '에고이스타 845' 모델도 있었다.

이카루스(위)와 ‘GQT R2R’(아래)
이카루스(위)와 ‘GQT R2R’(아래)

네덜란드 메타사스앤신스(Metaxas & Sins)라는 회사에서 만든 각종 오디오 기기들도 미래적인 디자인과 함께 곳곳에 스며든 원색적인 색깔로 시선을 압도했다. 인티앰프 '이카루스'(Ikarus)의 경우 메탈 섀시 디자인부터가 파격적이었지만, 빨갛고 파란 노브와 트랜스, 커패시터 같은 돌출된 부품들도 강렬한 눈맛을 선사했다. 아날로그 테이프 레코더 'GQT R2R'은 심지어 짙은 보라색 노브를 달기까지 했다.

그랜드 유토피아 EM 에보
그랜드 유토피아 EM 에보

10년만에 업그레이드된 프랑스 포칼(Focal)의 최상급 스피커 '그랜드 유토피아 EM 에보'(Grande Utopia EM EVO)도 다채로운 인클로저 색상으로 품격을 한껏 끌어올렸다. 간단히 말하면 파란색, 녹색, 회색, 흰색, 블랙 5종류인데, 사실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각 색깔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이다. 제작사에서는 이를 각각 메탈릭 블루, 브리티쉬 레이싱 그린, 애쉬 그레이, 카나라 화이트, 블랙 래커라고 표현하고 있다.

 SPL 포노앰프, 프리앰프, 헤드폰앰프, 파워앰프
 SPL 포노앰프, 프리앰프, 헤드폰앰프, 파워앰프

최근에 접한 오디오 중에서는 독일 SPL 제품들의 인상이 가장 강했다. 지난달 수입사 시청실에서 들어본 포노앰프 '포노스'(Phonos)였는데 기능과 성능, 소리도 좋았지만 전면 패널의 진홍빛 색감이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접한 수많은 포노앰프들이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쨌든 이렇게 예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나오는 음 역시 일체의 잡맛이나 거친 구석이 없어 더욱 좋았다. 예쁜 외모가 오히려 이 기기의 숨은 실력을 가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175 빈필 레코드 플레이어
175 빈필 레코드 플레이어

듣는 내내 만듦새에 감탄했던 오스트리아 프로젝트 오디오(Pro-Ject Audio)의 턴테이블 '175 비엔나 필하모닉 레코드 플레이어'도 흔치않은 색감을 선사했다. 일부러 색깔을 입힌 게 아니라 섀시와 부품 재질 자체가 워낙 독특했다. 빈필 175주년 기념모델답게 황동 재질의 황금색 섀시는 관악기 몸통에서 가져왔고, 목재 프레임 위에 칠한 하이 글로스 래커는 실제 바이올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LP 회전수를 선택하는 2개의 버튼은 진짜 플루트 버튼.

인폴 헤리티지
인폴 헤리티지

이밖에도 남아공 비비드 오디오(Vivid Audio)의 '기야'(Giya) 시리즈 스피커는 봄날 화사하게 핀 노란 개나리, 이탈리아 파토스(Pathos)의 인티앰프 '인폴 헤리티지'(InPol Heritage)는 흰 눈밭에 핀 빨간 동백, 이탈리아 소너스 파베르(Sonus Faber)의 '릴리움'(Lilium) 스피커는 영국 근위병의 붉은 유니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미국 압솔라레(Absolare)의 인티앰프 '시그니처 인티그레이티드 앰플리파이어'(Signature Integrated Amplifier)는 터키산 갈색 가죽을 호화롭게 두른 모습이 고급 세단을 빼닯았다. 

오늘따라 필자 방에 있는 오디오 기기가 다르게 보인다. 실버 섀시는 창백하고, 블랙 섀시는 의기소침하다. 스피커 앞을 가린 그릴도 우중충하기만 하다. 만약 진공관에 들어온 선홍빛이나, 디지털 기기 표시창을 밝힌 파란색, 앰프 손잡이의 은은한 와인빛이 없었으면 꽤나 우울할 뻔했다. 맞다. 지금은 오디오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말 색이름 사전을 정독하면서라도, 단풍으로 물들었을 용문산을 가서라도, 이 멈춰버린 색감을 되찾아야겠다.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