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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번역은 기술일까 감각일까 열정일까

조영학의 '여백을 번역하라'

(서울=뉴스1)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2018-09-12 11:57 송고
조영학의 '여백을 번역하라'

4년 전 서평을 썼던 책 중 '친애하는 청춘에게'(비전코리아 펴냄)가 있다. 당시 저자 김욱은 85세의 현역 번역가였다. 그는 70 세에 번역의 길로 들어서 15 년 동안 2백 권이 넘는 번역서와 7 권의 저서를 냈다. 김욱은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20대에 전쟁을, 30대에 혁명을, 40대에 군부독재를 겪고서 50대엔 산업화에 밀려 경쟁에서 낙오했다. 60대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IMF로 통째 날렸고, 70대에는 쪽방 들어갈 처지도 못돼 시골 묘지기로 남의 문중 제사나 지내 주면서 연명했다. 그리고 80대에 늦깎이 번역 작가가 됐다.

"청춘들아, 젊음이나 늙음이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가 너희들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분노와 무기력은 너희들의 목구멍에 밥을 벌어주지 못한다. 세상은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정면으로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게 그가 청춘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였다. 그에 대한 최근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어 그가 여전히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당시 이 책을 읽으며 85라는 숫자의 함정에 빠진 필자는 '외국어를 독해할 수 있으면 번역가 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가 보다'는 완벽한 오해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가장 최근에 어떤 번역가의 번역이 잘못됐다며 청와대에 그의 활동을 막아달라는 청원을 넣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지켜보면서 '번역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실감한 지 오래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줄어드는 대신 수준은 높아져서 그런 걸까? 번역서에 대한 불만들을 심심찮게 접하고, 필자 또한 번역서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던 바, 끝내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하는 전문 서적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한양대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영문학과 영어 관련 강의를 맡았다. 2003년부터 시작한 영어권 소설 번역이 80여 편에 이른다. 2013년 KT&G 상상마당에서 출판 번역 강연을 시작한 이래, 300명 이상의 번역 지망생과 기성 번역가에게 강연해 온' 번역가 조영학이 '여백을 번역하라'를 펴냈다. 번역을 논하고 있지만 넓게 보면 결국 '글쓰기'로 귀결되는데다 '오역의 추억' 같은 번역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양념으로 맛을 더해 술술 읽힌다.

저자는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바, 번역의 표준화까지 앞서 나간다. '여백을 번역하자'는 신념은 '기계적인 직역'을 신봉하지 말고 외국어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다시 쓰는 노력, 독자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인데 번역가 정체성이 그 여백에 들어있다. 여백은 또한 AI(인공지능) 번역기가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 번역가의 고유영역이다.

번역은 '의역과 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을 뿐이라는 저자가 그동안 겪어온 번역가의 세계(생활), 소위 '숙달된 번역 조교'(번역 장인)가 되기 위한 좋은 번역 방법론, 첨삭 사례, 역자 후기에 관한 의견과 사례까지 총망라했다. 방대한 분량은 아닐지라도 '번역가의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입문 방향타로서 부족함이 없다.

◇여백을 번역하라 / 조영학 지음 / 메디치 펴냄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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