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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2번 바뀌었지만…4만3800시간째 광화문 광장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 폐지 농성
"文 정부에 기대했는데…朴 정부와 달라진 것 없다"

(서울=뉴스1) 김다혜 기자 | 2017-08-20 07:00 송고
서울 종로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사 안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 농성장. 2017.8.18/뉴스1 © News1
서울 종로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사 안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 농성장. 2017.8.18/뉴스1 © News1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역사에는 4만3800시간째 한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2012년 8월, 예비 대선 후보들로부터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농성은 오는 21일 5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대통령이 2번 바뀌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농성은 1826일째에도 1827일째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 "5년째 외치지만 시민 대부분 부양의무제 뭔지 몰라"

"5년 동안 계속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쳤는데 크게 변한 게 없어서 안타깝죠. 아직 지나가는 시민들 태반은 그게 무엇인지, 왜 폐지를 요구하는지 모르세요." 18일 오후 광화문농성장을 지키던 한태신 활동가(25)는 말했다.

대다수는 시민은 농성장 앞에 늘어선 영정사진에 잠깐 눈길을 둘 뿐 별 관심 없이 농성장을 지나친다. 가끔 장애등급제나 부양의무제가 무엇인지, 폐지 후 대안은 무엇인지 물어보는 시민도 있단다. 그럴 때면 한씨는 신이 나서 설명한다.

부양의무제란 저소득층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자로부터 부양받지 못하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부양을 받지 못하는데도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 선정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아 복지 사각지대를 낳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2015년 기준 90만명이다.

228개 단체의 연대체인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공동행동)은 2012년 8월21일 경찰과 11시간 동안 대치한 끝에 '투쟁의 진지' 광화문 농성장을 만들었다. 당시 경선 중이던 대선 예비 후보들에게 요구사항을 알리고 새 정부 정책공약에 반영토록 촉구한다는 취지였다.

광화문 근처 집회·시위가 지금처럼 많지 않고 세월호 천막도 없었던 그 때부터 줄곧 공동행동은 광화문을 지켰다. 장소를 광화문역으로 정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다.이형숙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비장애인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기 위해 청와대와 가까운 곳 중 안정적으로 비와 눈을 피하며 노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4만3800시간의 노숙농성이 쉬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양영희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은 "한여름엔 땀띠가 났고 한겨울엔 잠이 안 올 정도로 추워 벌벌 떨었다"며 "우리의 투쟁 구호 중에 질긴 놈이 승리한다는 말이 있다. 5년간 우리는 어떤 노동현장에서도 볼 수 없는 가열찬 연대와 투쟁의 힘을 보여줬다"고 자부했다.

박정선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한 달에 한 번꼴로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대전에서 서울로 온다. 박씨는 "희귀 진행성 근육장애인이어서 무리를 하면 안 된다"면서도 "가난을 대물림하게 하는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서명을 받을 때 '돈을 더 달라는 것 아니냐'며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부당한 것처럼 말할 때가 가장 힘들다. 가난과 장애는 개인과 가족의 문제라는 국가의 논리, 관습적 사고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완전폐지 촉구 광화문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7.8.18/뉴스1 © News1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완전폐지 촉구 광화문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7.8.18/뉴스1 © News1

◇"文 정부에 기대했는데…朴 정부와 달라진 것 없다"

지난 5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광화문 농성장 활동가들의 희망과 기대가 컸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 3월22일 '복지·노동·공공성 강화를 위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부양의무자기준폐지행동이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5당 대선 후보들로부터 받은 질의 답변서에서도 부양의무제의 단계적 폐지 계획을 밝혔다.

당시 문 후보는 "모든 국민 개인의 기본권적 생존권 보장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우리나라 헌법정신"이라며 "부양의무자 기준은 궁극적으로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국민적 동의 및 재원 확보, 도덕적 해이 방지 장치 마련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급여별·인구집단별 우선순위에 따라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문 후보는 4월20일 강원 춘천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나의 몸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행정편의적 방식을 끝내겠다"며 "집권 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문 후보는 "장애인 정책들의 시행을 위해 GDP 대비 0.61% 밖에 되지 않는 장애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발표된 정부 계획은 공동행동 활동가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지난 10일 보건복지부는 '부양의무제 기준의 단계적 폐지'를 골자로 하는 제1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주거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2018년 10월부터 폐지하고 생계·의료급여는 중증장애인·노인 포함 가구부터 부양의무자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부양의무자와 수급자가 모두 노인 또는 장애인이면 오는 11월부터, 부양의무자가 중증장애인이면 2019년부터, 부양의무자가 기초연금수급자인 노인이면 2022년부터 부양의무자의 존재와 소득에 상관없이 살림이 어려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생계·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다. 정부는 2022년까지 생계급여 9만명, 의료급여 23만명, 주거급여는 90만명을 새롭게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에서는 문 정부를 향한 성토가 쏟아졌다. 윤종술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대국민 사기극을 할지 생각도 못 했다"며 "부양의무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면서 내용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한 것처럼 아주 조금 완화했을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 대표는 "중증장애인이 포함된 가구를 우선 폐지한다기에 잠깐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부양의무자가 됐을 때 자식에 대한 부양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공동대표도 "포털사이트 등에선 폐지됐다고 나오는데 당사자들은 진짜 폐지가 아님을 알기에 더욱 심한 배신감에 슬퍼했다"고 말했다.

중증장애인이나 노인이 다른 사람의 부양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한 것은 성과이지만 이들이 누군가의 부양에 기대어야 한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60세인 비장애인 부모는 30세 중증장애인 자식을 여전히 부양해야 한다. 30세의 비장애인 자식 역시 60세의 중증장애인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완전폐지 촉구 광화문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7.8.18/뉴스1© News1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완전폐지 촉구 광화문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7.8.18/뉴스1© News1

◇ "질긴 놈이 승리한다…폐지 약속 받아낼 때까지 투쟁"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전히 폐지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검토됐지만 의결에 이르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지난 2월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 역시 계류 중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전 의원의 개정안을 검토하며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및 범위 축소에 따른 재정적 부담(연간 6조7598억원) △가족 간 재산 이전을 통해 수급자로 인정받으려는 도덕적 해이 발생 우려 △부양의무자가 고소득자인 경우까지 일괄 보호하는 것은 불합리 등을 지적했다. 

전 의원은 제1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과 관련해 "새 정부가 발표한 정책은 부양의무자 기준의 '완전폐지'가 아니었다"며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를 포함한 전체 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되지 않으면 복지 사각지대는 해소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또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부모 부양의 책임자가 가족이라는 인식은 1998년 89.9%였지만 2014년에는 31.7%로 크게 줄었다"며 "더 이상 재정적 이유를 들어 광범위한 빈곤층을 양산하고 가난을 대물림하게 하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유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에 부양의무자기준의 완전폐지로 추가될 예산을 더하면 GDP 약 1%가 된다"며 "GDP 1%로 한국사회 가장 가난한 사람들 5%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면 이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난 5년 간 요구한 것은 명확하다"며 "주거급여뿐 아니라 생계·의료 급여에서도 부양의무자 기준이 완전히 폐지될 수 있도록 광화문 지하도 농성장을 중심으로 더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공동행동은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삶을 숫자 등급으로 저울질하는 생사의 저울로 그 자체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라며 "제2의 도가니, 제2의 형제복지원이 끊이지 않는 장애인수용시설 정책을 폐지하는 것 역시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형숙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1826일, 1827일 우리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 3대 적폐가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문 정부에게 반드시 약속을 받고 승리할 때까지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dh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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