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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칼럼] 그리운 중대장님

(서울=뉴스1)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 | 2017-06-25 08:01 송고 | 2017-06-26 21:36 최종수정
편집자주 원조 '스타PD'인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61)는 동북고교, 이화여대 및 아주대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MBC·OBS·JTBC 등 방송국을 거치며 '퀴즈아카데미' '우정의 무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 수많은 인기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TV가 아니라 '문화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더 잘살기 위해 발버둥치기보다는 함께 다 잘사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 주 대표의 속내를 듣는 공간을 마련했다.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 © News1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푸르른 날' 중에서

저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이력 하나가'우정의 무대'입니다. 귀에 익지 않은 분들이라면'진짜 사나이' 옛날 버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그리운 어머니'입니다. 1990년대에 군대생활을 하신 분이라면'작은별 악단'이 연주하던 음악을 기억하실 겁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나면 눈물이 납니다." 가족생각에 눈물 흘리는 병사들이 화면에 가득했습니다.

구성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이 부대에 면회를 신청합니다. 부대가 제공한 후보자들 중 사연이 곡진한 병사 하나를 제작진이 가려냅니다. 해당 병사에겐 사전에 통보하지 않습니다. 엄선된 어머니는 사전교육을 철저히 이수합니다. 어머니는 무대 뒤에서 작가와 함께 대기하며 인터뷰 연습을 합니다.

진행자(뽀빠이 이상용)는 노련한 질문으로 병사들의 애간장을 태웁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면 이건 그야말로 대형사고입니다. 아들이 여덟 살 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엄마랑 목욕탕에 갔다가 입장을 제지당했다는 식의 에피소드를 끌어내는 게 진행자의 역할입니다.

어느 지점까지 어머니와의 대화가 이어지면 병사들이 무대에 뛰어오릅니다. 한결같이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고 '절규'하는 병사들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진짜 아들 한 사람 빼고는 모두 거짓말을 한 셈인데 그걸 가지고 대한민국군인들의 도덕성을 질책하는 시청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고, 그만큼 애절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모자 상봉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떡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가 등장하면 진짜 아들은 초고속으로 어머니 품에 안깁니다. (간혹 보초를 서다가 급히 연락 받고 달려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리얼했습니다.) 그때의 배경음악은 '어머님 은혜'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후 주임상사(지금은 원사)가 휴가증을 건네줍니다. 뽀빠이는 아들에게 어머니를 업으라고 주문하고'고향 앞으로'를 함께 외치면 프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평범한 어머니가 평범한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프로그램이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건 이곳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KBS에는 유명 연예인이 평범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의뢰하는 TV프로가 있었습니다. 십몇 년 방송되는 동안 단 한 번도 빚쟁이를 찾아달라고 요구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대부분 첫사랑이나 은사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TV는 사랑을 싣고'입니다.

상대를 찾는 과정이 사뭇 극적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연을 맺은 곳에서부터 추적이 시작됩니다. 의뢰자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가 자연스럽게 노출됩니다. 스튜디오에 나와 있는 연예인은 그리운 사람을 만난다는 일념하에 사소한 수모 정도는 각오합니다. 여기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의뢰인이 세 번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바로 이 음악과 함께 첫사랑, 혹은 은사님이 커튼을 열고 등장합니다. 그 음악의 제목이 바로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이었습니다. 사랑은 세월을 이기는 힘이 있나봅니다.

만약 제가 저 프로에 출연한다면 누구를 찾아달라고 부탁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게 선행조건이지만 그래도 상상은 자유입니다.) 저는 기억의 심연에서 전춘식(全春植)이라는 이름 석 자를 건져 올렸습니다. 이분은 저의 첫사랑도 아니고 은사님도 아닙니다.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연무대 육군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제가 소속된 30연대 4중대 중대장이었던 분입니다.

그분의 자기소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전춘식 대위다. 내 이름이 봄 춘(春)에 심을 식(植)인데 여러분도 청춘의 시기에 좋은 것들을 심기 바란다." 그날 이후 저는 어려움이 생길 적마다 자주 이 말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은 심어야 할 때다. 심어야 나중에 거둘 수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진리다."

‘우정의 무대'를 연출한 덕분에 저는 군부대에 이따금 강사로 초대받습니다. 이번엔 바로 제가 훈련받던 육군훈련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30연대 4중대 막사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전춘식 대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촘촘한 행정전산망 덕분에 전춘식 대위가 지금 청주에 살고 계신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전춘식 대위를 37년 만에 뵙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세쌍둥이 손자를 둔 초로의 신사는 연신 저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고마운데 오히려 그분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죄송할 정도였습니다. 살아있으니 만날 수 있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반가울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저의 비상한 기억력도 한몫했습니다.)

문화재단의 대표로 일하는 저는 이번 만남을 통해 뜻밖에도 문화의 역할을 상기했습니다. 문화는 '심는(植) 것'이고 그 시기는 '봄(春)이 적당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때에 심고 잘 기르면 추수감사절은 반드시 옵니다. 전춘식 대위와의 감격적 상봉에서 제가 덤으로 얻은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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