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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전막후, 탄핵에 이르기까지] 朴대통령과 국회 치열한 수싸움

(서울=뉴스1) 곽선미 기자 | 2016-12-09 16:35 송고
대한민국 '운명의 날'인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이 하루앞으로 다가왔다.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하기 위한 의결정족수는 의원 300명 중 200명이다. 사진은 20대 국회의원 프로필 사진으로 청와대를 모자이크 합성했다. 2016.12.8/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 문턱을 넘기까지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는 치열한 수(數) 싸움을 벌였다.
정치권이 각종 의혹을 제기해 박 대통령을 궁지로 몰면 대통령은 개헌과 담화 등 각종 카드로 정국 돌파를 시도하는 식이었다. 양측의 날카로운 대립과 공방전 속에서 변수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장외의 촛불민심이었다.

먼저 대통령은 정치권과 언론보도를 통해 최순실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이 불거지고 이것이 확전될 조짐을 보이자 지난 10월24일 이례적으로 '개헌 카드'를 꺼냈다.

이전까지 '개헌은 블랙홀'이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해온 대통령이 예상에 없던 개헌카드를 내밀면서 정국이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소용돌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그날 밤 종합편성채널 JTBC가 대통령 연설문 등이 담긴 최순실씨의 태블릿PC를 입수, 보도하면서다.
JTBC는 태블릿PC에 청와대 핵심 문건과 연설문이 다량 담겨있어 최순실씨가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을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최순실씨와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온 청와대는 10월25일 오전 내내 숙고를 거듭하다가 오후 4시께 '대국민 사과'를 했다. 1차 담화로 불리는 이 대국민 사과에서 박 대통령은 최순실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연설이나 홍보분야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1차 담화는 성난 민심을 가라 앉히기보단 깨우는 계기가 됐다. 첫 대규모 촛불집회가 10월29일 광화문일대에서 2만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사태가 장기전에 돌입할 조짐을 보이자 청와대는 비서진 사퇴 및 교체를 시도했고 최순실씨도 극비 귀국해 검찰에 출두하는 등 짜맞춘 듯한 행보가 이어졌다.

또 박 대통령은 당시 야권에서 요구가 거셌던 '거국중립내각'을 의식한 듯 야권 인사로 분류되는 김병준 국민대교수를 11월2일 전격 총리 후보자로 내정, 정국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야권과 사전 협의없이 진행된 총리 임명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2차 담화는 그 주인 11월4일에 이뤄졌다. '검찰조사에 성실히 응하겠다'고 하는 등 1차 담화때보다 진전된 내용이 담겼으나 2선후퇴나 정국 수습책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국정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해석됐다.

싸늘한 민심은 더해갔고 2차 촛불집회 참가자는 10만명으로 불어났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대로 급락했다고 발표했다.

날개없는 추락에 고심하던 박 대통령은 11월8일 국회를 전격 방문해 정세균 국회의장과 회동을 가졌다. 해당 자리에서 김병준 총리 카드를 접는 듯 "여야 합의로 총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민심을 등에 업은 야권은 '실기(失機)'를 이유로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 사이 3차 촛불집회(11월12일) 참가자는 100만명으로 2차의 10배나 급증했다. 이 시기 여권에서도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한 비주류 의원들이 탄핵을 공식 언급하기 시작했다.

야권과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여러 카드를 제시했지만 먹히지 않자 박 대통령은 수세적 태도를 풀고 강경 대응 태세로 돌아섰다.

11월16일 김현웅 법무장관에게 부산 엘시티(LCT) 비리사건을 신속, 철저하게 수사할 것을 주문하면서 정치권을 압박했다. '하야'를 주장하던 야권은 당장 "국면전환용 꼼수"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사정정국을 조성해 정치권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라는 풀이를 내놨다.

11월20일에는 박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유영하 변호사가 "검찰 수사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해 2차담화를 사실상 뒤집었다. 야권은 하야 요구에서 한발 나아가 탄핵을 당론으로 확정하는 등 퇴로를 막아섰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동원했는데도 검찰 수사로 포위망이 좁혀 오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서 박 대통령은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임기 단축을 포함해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며 국회에 공을 넘겼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사퇴 시기와 방식 등은 전혀 언급이 없었고 공을 정치권으로 던지는  모양새를 취하자 야권은 일제히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그러나 당시까지 탄핵에 긍정적이었던 여당 비주류는 대통령이 퇴진 의사를 밝힌 만큼 여야가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야권과 여당 비주류의 탄핵공조는 급격히 흔들렸고 탄핵안 가결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그주인 12월3일 열린 6차 주말 촛불집회는 3차 담화 영향으로 잦아들 것이라는 전망을 뒤집고 사상최대인 232만명이 운집했다. 횃불로 변한 촛불민심은 여권 비주류를 움직였고 사실상 조건없이 탄핵 대오로의 회군을 결정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카드로 여권 비주류와의 면담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주류가 이를 거부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대신 박 대통령은 여권 지도부와 지난 6일 탄핵 전 마지막으로 회동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탄핵안이 가결되면 결과를 수용할 것"이라고 '최후변론'을 밝혔다.

탄핵에 동참하려는 비주류는 물론 여권 중도파와 친박 이탈파를 포섭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됐지만 여당은 '자유투표'를 결정하며 탄핵 표결에 참여키로 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여당 지도부와 주류 친박세력의 지원사격과 조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기울대로 기운 판세를 뒤집기엔 크게 미흡했다.


g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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