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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배임죄…곡학아세(曲學阿世) 하지 맙시다

(서울=뉴스1) 윤진희 기자 | 2016-09-23 09:22 송고 | 2016-09-23 09:47 최종수정
윤진희 기자© News1
재계서열 5위 롯데그룹 총수 신동빈 회장이 배임혐의 등으로 검찰에 소환되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자금 600억원을 한진해운에 투입하자 배임죄에 관한 논란의 불씨는 어김없이 되살아났다.

우리나라에서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재벌 총수들이 유죄로 판단 받은 범죄혐의의 대다수는 '배임'이다. 역대 정부의 재벌총수에 대한 '특별사면'에서도 '배임죄'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재벌총수들의 배임은 회사와 주주들에게 수십억에서 수백억, 더 나아가 수천억에 이르는 '재산상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

절도, 사기 등이 서민범죄라면 '배임'은 분명히 재벌범죄다. 단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은 지분만으로 기업 전체를 장악하는 재벌구조는 필연적으로 '배임'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소수의 지배주주가 기업 경영전략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나 주주 전체의 이익은 지배주주의 이익 앞에 종종 도외시되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범죄여서 그런지 이들을 옹호하는 측의 '배임죄'에 대한 공격은 유독 세다. '절도'나 '살인'을 처벌하는 게 잘못됐다는 비판은 없는데 '배임죄' 처벌이 잘못됐다는 비판은 때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배임죄 비판론자와 법 개정론자들은 우리의 배임죄 규정방식 등이 잘못됐다며 배임죄가 '기업가 정신'을 말살하는 '악법'인양 호도한다.

일부 학자들은 '배임죄'가 적용되지 않는 면책사유를 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자는 취지의 개정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들은 미국이 형법판례가 아닌 상법판례를 통해 발전시켜온 '경영판단의 원칙' 법리를 우리도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처럼 말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우리나라 현행법과 제도 아래에서 미국과 독일의 '경영판단 원칙'을 섣불리 수용하면 배임죄가 무력화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기업 이사의 의무를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주의의무’와 회사의 이익과 제3자 등의 이익이 충돌할 때 회사에 충실해야 할 ‘충실의무’로  분리하고, 주의의무 위반인 경우에만 '경영판단원칙' 법리가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은 이사의 의무를 나누어 정하고 있지 않다. 법원의 판례 또한 기업 이사의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식 ‘경영판단원칙’을 무차별 수용하면 기업 이사진의 행위에 대한 면책범위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또 우리나라 기업 이사진은 오너 일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기업 이사진이 거의 모든 책임에 대해 광범위하게 ‘면책’을 받게 되면, 이는 결국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사적이익 추구’나 위법행위 등에 대한 '면책'과 다름없게 된다. 

배임죄 폐지론자들이 개정론자들로 변모한 이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모양새다.

재벌그룹 내 계열사에 대한 일감몰아주기나 부당지원은 회사와 다른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다. 그룹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오너일가는 A기업의 손해를 B기업에 전가하거나, 도산 직전의 A기업을 부당지원해 되살려내도 전체적으로는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B기업과 B기업의 주주들은 그룹 오너의 판단에 따라 재산상의 손해를 입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본질적으로 '개인착복'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경영전략' '경영판단'이라는 허울을 덧씌우면 재벌집단의 '사익추구' 행위에 대해 법적책임을 묻기 어려워진다. 소액주주들은 물론이고 회사의 노동자 등 관련자들이 입는 손해는 어디에서도 구제받을 수 없게 된다.

배임죄 처벌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인다는 미명아래 법에 면책사유를 욱여넣으면 검찰이 기업 위법행위에 대한 수사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소송시스템 아래에서 수사기록이나 형사재판 기록, 법원의 형사판결 등이 없으면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 등은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할 공산이 크고, 기업의 배임행위에 대한 입증조차 불가능해진다.

재벌그룹 전체의 이익이 아닌 개별 회사입장에 따른 합리적 투자전략에 따라 손해가 발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법원의 몫으로 남겨두면 된다. 적어도 기업의 위법행위에 대한 법적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원천봉쇄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대학에서 전공학문을 심화 학습하면 '석사'와 '박사'라는 학위를 준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때부터 졸업가운 위에 '후드'를 하나씩 덧입혀주는데, 그 '후드'는 뒤에서 보면 방패모양을 하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했으니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에 맞서 정의의 ‘방패’ 역할을 하라는 의미다. 우리 모두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지 말자. [법조전문기자·법학박사]


juris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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