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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다문화섬①]"여기부터가 중국 땅입니다"…가리봉동을 가다

"조선족 어울려 산 지 벌써 20년"…붉은 간판이 어지러운 이색지대
이방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분투…"차가운 시선 가장 힘들어"

(서울=뉴스1) 김태헌 기자 | 2016-08-27 07:00 송고
편집자주 국내 체류 외국인이 지난 6월 기준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 실질적인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이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외국인 노동자 밀집구역은 다문화 시대가 만든 이색지대다. 실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외딴 섬으로 존재하고 있다. 뉴스1은 1개월간의 '서울의 다문화섬' 관찰 기록을 정리해보았다.
이른 새벽의 남구로역 인력시장. © News1 최현규 기자
이른 새벽의 남구로역 인력시장. © News1 최현규 기자
"여기부터 중국 땅입니다". 남구로역을 지나던 택시기사가 짧게 말했다.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가리봉 시장에 들어서자 깔끔한 도로와 높은 빌딩이 사라지고 한자로 된 붉은 간판들이 어지럽게 이어졌다. 구로·가산 등 대규모 디지털단지 사이에서 이 곳만 시간이 비껴 간 것처럼 보였다. 걷는 내내 높고 빠른 중국 말소리가 귓등을 연신 때렸다. 시장 길을 따라서 중국 음식점과 노래방 수십개가 빽빽하게 줄 지어 있었다. 23일 찾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은 말 그대로 '한국 속 중국'이었다.

가리봉동은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 등과 함께 서울 내 중국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으로 꼽힌다. 가리봉동은 1990년대 구로공단 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이전하면서 한국 노동자들이 빠져나갔고, 이후 한·중 수교로 인해 동포들이 빠른 속도로 유입됐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3월 기준 구로구에 사는 3만1529명의 등록 외국인 중 중국인(한국계 포함)은 2만9931명으로 가장 많았다.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이들은 가리봉동과 대림동 일대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가리봉종합시장(옌볜시장)은 이들의 문화를 가장 직접적이고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시장 삼거리부터 남구로역 앞 오거리까지 수백미터에 걸쳐 '조선족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시장엔 수십개의 직업소개소와 음식점, 노래방, 생활용품점이 옹기종기 붙어있다. 간판과 안내문은 대부분 한자로 돼 있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찾아가보니 기자가 생전 처음보는 빵과 음식들이 진열 돼 있었다.

한 중국식품점 주인은 "중국에서 파는 음식 재료 대부분을 구할 수 있다"며 "이 근방에 조선족이 어울려 산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초두부 음식점 등 즐겨찾는 식당을 중심으로 모이는 지역 모임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종합시장. © News1 허예슬 인턴기자
서울 구로구 가리봉종합시장. © News1 허예슬 인턴기자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초두부 음식점을 찾았다. 들어서자 마자 한 뼘 높이의 작은 간이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 손님 대부분이 방바닥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맨 바닥에 앉지 않는 중국 현지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주인은 설명했다.

낮 시간인데도 반주를 걸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주로 초두부·양꼬치 등 전통 음식에 코우뻬이(컵술)나 맥주를 곁들인다고 했다. 한국 순대의 2~3배 굵기의 옌볜식 순대도 있었다. 가격은 5000원 정도. 하나만 먹어도 배부른 큰 고기 호떡도 1개에 1000원 정도면 먹을 수 있다.

시장 주변 작은 골목길에는 여인숙 등 여관들과 원룸들이 밀집해 있었다. 여관에 들어가 방값을 물으니 가격 대신 "방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주인은 최근 한족들이 유입되면서 공실이 거의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달방(월세를 지불하고 한 달 단위로 사는 방)은 진짜 없어. 다른 곳에 한 번 가보슈."

시장부터 서울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까지는 인력사무소 수십개가 있다. 남구로역 새벽인력시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인력시장이다. 매일 새벽 1000~1200명의 일용직 노동자가 운집해 서울·수도권 일대 건축 현장으로 나간다. 이곳에 몰리는 인파 10명 중 8~9명은 구로구와 영등포구에 자리를 잡은 중국 동포다. 이들은 하루 10시간가량 일을 하고 10~11만원을 받는다. 돈을 벌기 위해 홀로 한국에 온 뒤 자리를 잡아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도 있다.

가리봉동에 사는 장모씨에 따르면 남성 동포들은 주로 인력시장에서 일을 구하지만 여성들은 식당, 단란주점, 백화점, 면세점 등 일터가 다양하다고 했다. 장씨는 "일이 좀 힘들어도 돈을 많이 벌려면 식당이나 주점으로 가야한다"며 "면세점은 일이 편하지만 (돈이)별로 안 된다"고 말했다.

인근 학교들은 다른 곳보다 중국 동포 자녀 비율이 높다. 영등포구의 한 초등학교는 전체 학생의 40%가량이 동포 자녀였다. 서울시교육청은 이 지역 초등학교를 특성화 학교로 바꿔 '한·중 이중언어 국제초교'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국제학교를 설립해 중국 동포와 내국인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취지다.

다음 학기부터 한국 학교로 편입을 준비하는 동포 자녀 김모양(10)을 한 초등학교 놀이터에서 만났다. 한국어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수줍게 말하는 김양의 모습은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외국인 인구 증가가 일반 국민들의 불안감을 높이고 있는 측면도 있다. '오원춘 사건' 등 강력사건 피의자로 중국 동포가 종종 등장함에 따라 외국인, 불법체류자 들을 기피하는 포비아 현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범죄 통계는 조금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 2014년 발표한 '외국인 밀집지역의 범죄와 치안실태 연구'에 따르면 2011년 내국인 인구 10만명당 검거자 수는 3692명이었다. 같은 년도 외국인 인구 10만명당 검거자 수는 내국인의 3분의 2 수준인 2429명이었다.

다만 외국인 범죄는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이 지난 1월 발표한 '치안전망 2016'에 따르면 2014년 외국인 검거자 수는 3만684명으로 2010년(2만2543명)보다 36.1% 증가했다. 이 중 폭력범죄는 9013건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취재를 시작할 땐 기자도 '중국 동포'하면 영화 '황해'를 떠올렸다. 취재 과정에서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주민들이 문화적 인식 차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건 사실이다. 허나 적지 않은 동포들은 '한국 속 이방인'과 '한국 속 한국인' 사이의 선 위에서 분투하며 살고 있었다.

한 다문화센터 관계자는 "포털 기사에서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들을 본 뒤로 기자들의 취재요청에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라며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언어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자신들을 향한 차가운 시선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solidarite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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