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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누구나 재밌겠지만 스웨덴이라 쓰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2014-12-28 14:30 송고 | 2014-12-28 17:35 최종수정
열린책들.© News1

'페미니즘의 도전'을 쓴 정희진은 베스트셀러는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한다. "공통분모가 없는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베스트셀러는 "내용이 절충적이거나 피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의도와는 달리 베스트셀러의 조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준다. 각기 다른 사람들을 이어주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가 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인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은 그런 관점에서 베스트셀러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이야기는 두 축으로 흘러간다. 주인공 알란이 100세 생일에 양로원을 탈출한 후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갱단과의 추격전과 폭약 전문가로 살아온 지난 100년의 개인사가 교차하는 방식이다.

개인사라고 하지만 알란의 100년사는 20세기 세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05년에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폭약 회사에 취직하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술 덕에 상상하지 못할 인생을 살게 된다.
'검둥이'를 보겠다며 스페인에 갔다가 우연히 내전 중인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고,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하다 미국 과학자들에게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 단서를 알려준다. 훗날 러시아는 술에 취한 알란이 흘린 정보로 핵 개발에 성공하지만 알란은 스탈린에게 밉보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노역을 간다. 가까스로 북한으로 탈출하지만 김일성과 어린 김정일을 만나면서 다시 위기에 처하는데 과거 마오쩌둥의 아내를 구한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는 식이다.

스페인 내전, 중국 국공 전쟁, 한국 전쟁, 미국과 러시아의 핵 개발 경쟁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주요 장면은 공통분모가 없는 독자들을 '세계사'라는 큰 틀로 끌어안는다. 이는 '창문 넘어'가 독일 200만부, 프랑스 80만부, 스웨덴 100만부 등 전세계에서 500만부 이상 판매된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사를 다뤘지만 이야기는 그리 깊지 않다. 세계사는 반성의 대상이 아니라 풍자의 대상이다.

알란이 꼬마 김정일에 했던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 훗날 김정일이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거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두고 "당신은 인도네시아에서 정치하는 게 나을 뻔했어. 거기였다면 아무 문제 없이 승승장구했을 텐데 말이야"라며 부정부패를 무능으로 여기는 식으로 세계사를 유머로 버무린다.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세계사에 기가 차면서도 웃으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창문 넘어'를 올해 베스트셀러로 만든 마지막 요인은 100살에도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칠 만큼 기력이 팔팔한 노인 알란에 있다. 앞 이야기들이 베스트셀러의 필요조건이라면 알란의 캐릭터는 충분조건 쯤 된다. 그 정도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그의 힘은 세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인생 철학으로 삼아 평생 푸짐한 음식과 술을 추구하고, 정치와 종교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세계사에 관여해 온 알란은 마지막까지 노후연금과 안락한 양로원 생활을 마다하고 기꺼이 모험을 감행한다. "꼭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죽는다고 하여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라는 게 그의 변이다.

거리로 나선 100세 노인은 갱단의 돈 가방을 들고 평생 좀스러운 사기꾼으로 살아온 율리우스, 수십 개의 학위를 거의 딸 뻔한 베니, 코끼리를 키우는 예쁜 언니 구닐라 등 잡다한 무리와 함께 인생 2막(?)을 연다.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보다 스웨덴 소설이라는 데 눈이 간다. 알란 특유의 능청과 여유, 종교와 이념에 대한 무관심은 전쟁과 투쟁으로 점철됐던 100년 세계사에서 비켜나 있었고 북유럽 복지국가의 전형인 스웨덴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letit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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