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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45년 세운상가 주상복합 꿈도 물거품 위기

'말'뿐인 재정비계획에 '발' 끊긴 왕년의 전자상가 메카

(서울=뉴스1) 맹하경 기자 | 2013-12-22 22:59 송고

서울시는 지난 6월 25일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을 발표했다.서울시의 변경안에 따라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이자 과거 전자제품 소비중심지였던 세운전자상가는 기존의 대규모 철거 후 재개발 계획에서 소규모 분할 개발 계획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일부 세운상가 지주가 서울시의 변경안에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이달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장사동 세운전자상가를 찾은 시민이 상점을 지나치고 있다. 2013.12.22/뉴스1 © News1 정회성 기자
사는 이는 없고 파는 이만 남았다. 광활한 종묘공원 맞은편 외롭게 서 있는 건물에는 때 묻은 간판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1968년 완공 뒤 영욕의 45년 세월을 지나고 있는 이곳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운상가다.

"죽어도 너무 죽었어요. 이젠 일으켜 세우려 해도 못 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22일 세운상가에서 만난 상인 백춘희씨(56)는 요즘 상권을 묻는 질문에 "손님이 찾아와야 장사를 하는데 발길 끊긴 지가 벌써 수년이 넘어갑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12년째 전기 회로 부품을 판매하고 있는 백씨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장사했죠"라고 푸념했다.

백씨의 말처럼 세운상가에서 손님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은 상가 점포들 사이 골목은 주인을 못 찾은 물건들만 어깨를 부딪치며 앉아있다. 휑한 잿빛 상가 골목에서는 세월이 묵은 퀴퀴함이 풍겨 나왔고 곳곳에는 비워진 가게의 간판이 가까스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원찮은 벌이는 생계까지 위협했다. 백씨는 "장사가 하도 안되니 입맛도 없지만 맘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나요"라며 "아끼고 아끼면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는 거지요"라고 덧붙였다.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진 가게 벽면을 가리키던 백씨는 "요즘엔 예쁘고 깨끗한 가게들도 많은데 이렇게 노후해서는 손님 끌기가 더 힘들죠"라며 "깔끔하게 바꾸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서울시는 지난 6월 25일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을 발표했다.서울시의 변경안에 따라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이자 과거 전자제품 소비중심지였던 세운전자상가는 기존의 대규모 철거 후 재개발 계획에서 소규모 분할 개발 계획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일부 세운상가 지주가 서울시의 변경안에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이달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장사동 세운전자상가를 찾은 시민이 줄지어 들어선 상점들을 지나치고 있다. 2013.12.22/뉴스1 © News1 정회성 기자

세운상가가 시작부터 초라했던 것은 아니다. 산업화 붐이 한창이던 1968년 현대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 청계상가 등으로 구성해 완공된 세운상가군은 온갖 전자기기들을 살 수 있는 전자상가의 메카였다. TV부터 냉장고, 카세트 등 전자제품을 파는 것뿐 아니라 수리부터 제작까지 가능했다.

세운상가가 들어설 때부터 장사를 시작해 이곳의 터줏대감격인 장영열씨(80)는 "지금은 흉물이지만 예전엔 정말 호황기였지요"라며 "사람들은 전자제품을 사러 날이 갈수록 모여들었고 수리하러 오는 사람들까지 정말 붐볐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30년 넘게 공업소를 운영해온 박형동씨(78)는 "라디오, 선풍기부터 무전기, 전기회로 부품까지 없는 게 없었어요"라며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이 다 모여있으니까 주부도 오고 학생들도 오고, 그때가 전성기였죠"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그 때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바빴어요"라며 "없어서 못파는 물건도 많아서 너도나도 제품 종류를 늘려나갔죠"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세운상가의 기세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강남권이 개발되면서 상권이 옮겨가기 시작했고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탄생하면서 손님을 뺏기기 시작했다. 세운상가를 지키던 상인들도 손님들을 따라 서서히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22년 동안 세운상가에서 컴퓨터도매업을 이어온 홍병진씨(55)는 "용산이 뜨기 시작하면서 눈치 빠른 장사꾼들은 다 그리로 빠져나갔어요"라며 "가게는 줄줄이 비어가고 찾는 사람들은 더 빨리 줄고 90년대 때는 완전 쇠락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과거의 세운상가(왼쪽·사단법인 문화우리 ‘도시경관 기록보존’ 프로젝트 제공)과 현재의 세운상가 © News1

발길이 끊긴 세운상가의 재기를 위해 서울시 측에서도 잇따라 계획을 내놨다. 2002년 도시환경정비구역 지정, 2006년 재정비촉진구역지정에 이어 2009년에는 세운상가 대변신을 목표로 녹지축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의 녹지축 조성과 122m 높이의 새로운 주상복합 건물 세우기가 목표였지만 단꿈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주변지역이라는 이유로 문화재청 측이 초고층 건물 건축에 제동을 걸었다. 높이를 75m로 낮추라고 요구했다. 이어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부동산 경기침체까지 이어졌다. 경기 불황이 계속되니 재정비의 사업성은 불투명해졌고 여타할 대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낙후된 세운상가는 갈 곳을 잃은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지지부진한 재정비 계획의 여파는 고스란히 상인들에게 돌아왔다. 재개발 소식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거래처도 끊기고 세운상가군만 엉거주춤 남아있게 됐다. 그러다 최근들어 서울시가 기존의 정비 계획을 변경하면서 재정비를 촉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올 6월 시가 내놓은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에는 리모델링 작업만 포함한 '세운상가군 존치'가 담겨있었다.
20일 오후 서울 중구 인현동 PJ호텔에서 열린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 주민 공청회에 참석한 지구 내 토지등소유자 및 이해관계인 등이 설명 자료 등이 담긴 리플릿을 살펴보고 있다.공청회에 앞서 세운 2구역 관계인들은 통합개발을 원한다며 소규모 난개발을 하려면 서울시가 토지를 매입해서 개발하라고 주장했다. 2013.12.20/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주상복합 건물로 탈바꿈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될 위기가 닥치자 상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상인 최종휘씨(61)는 "상권이 완전히 죽은 상황에서 존치시키면서 어떠한 개발이 진행될지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며 "지금까지 수십년을 기다린 보람이 고작 리모델링이라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고 허탈해 했다.

장영열씨(80)는 "40여년이 지나면서 세운상가는 이제 도심의 흉물이 됐어요"라며 "다 늙어버린 이 곳에 분을 바르며 화장을 해봤자 그게 예뻐지나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리모델링 차원의 개발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어요"라며 "온라인 시대에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백화점을 가는 와중에 더 멀리 내다보는 계획안이 나와야 합니다"고 촉구했다.

서울시 측은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상황도 바뀌기 때문에 당초 계획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신중수 역사도심관리과장 "계획을 내놓을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만 시대가 변했고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이 상황에서 대규모적으로 재개발을 추진한다면 계획했던 사업 이익을 얻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존치 대상인 세운상가군에 대해서는 별개의 프로젝트 팀을 세우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재정비촉진계획의 총괄계획가 ㈜미래이엔디 백운수 대표는 "세운상가에 대한 큰 방향을 잡을 팀을 따로 구성해 상인들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며 "전문가와 주민 여러분들, 영업하시는 분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협의를 하는 조직을 내년 초에 만든 후 구체적인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상인들은 시의 약속에 신뢰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장씨는 "우리 세대 때 제대로된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라도 이득이 되도록 사업이 진행돼야 하는데 몇년동안 말만 바뀌고 있지 않느냐"고 우려했다.

1970~1980년대 전자상가 메카라는 영예부터 도심의 흉물이란 치욕까지, 세운상가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45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년의 유명세를 뒤로하고 허름한 모양새만 갖추고 있는 세운상가를 바라보면서 상인들은 또 내일 벌이를 위해 가게를 정리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hkmae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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